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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 해외생활,자유여행

워킹맘으로 살아남기 1탄 _ 첫출발/출산/이직

by +*#$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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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이 적성에 맞는 나는 일하는 여성으로 성공하고 싶은 맘이 컸다.

과거 일을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이겨냈는지 신기할 정도다.

남성에 비하면 훨씬 적은 인원의 성공한 여성들이 있었고, 나도 저 사람들의 대열에 서고 싶었으나 그건 정말 꿈같은 일일 뿐이었다.

 

내가 신입사원이 된 시기는 1993년 1월 !

첫 출근날은 모든 환경이 낯설어 종일 떨고 있었던 것 같다.

회사에 가면 한 본부를 책임지는 본부장님을 비롯해 이사님,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대리님 그리고 사원!

첫 출근해 난 그 사원 자리를 가슴설레이며 조심스레 지키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층층시하 선배님들의 조언과 장난을 이겨가며, 일을 인수인계받을 때는 등에서 땀이 줄줄 날정도로 긴장했던 듯하다.

당시 여성에게 대부분 보조업무가 주어졌었고, 내가 있는 팀만 여성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남녀차별은 내가 바꿀 수 없는 너무도 큰 장벽이었다. 그래서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버리고, 너무도 용감하게 나를, 내 능력만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 외국계 회사로 이직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무모했던 내 다음 회사 이직은 성공적이었다. 독일계 회사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나름 외국사람들과 소통하며 일하는 것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었고, 연봉을 올리는데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지독히도 누군가에게 통제받는 걸 싫어한다. 그 잔소리를 듣기 싫어, 미리미리 알아서 처리하고, 말이 나오지 않게 일하려고 하여, 주변에선 너무 완벽주의가 아니냐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난,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면서 본격적인 워킹맘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출산!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니, 낯설고 두렵고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몸무게는 계속 줄고 있었고, 하혈도 여러 차례!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위기를 여러 번 고민하는 일들이 있었다. 입덧이 심해 의사 선생님께 "이렇게 하다간 엄마가 죽습니다. 무조건 많이 드세요"라는 경고를 듣고, 매일 퇴근 후 링거를 맞고 집으로 귀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체력의 한계가 올 때마다 "포기하면 안 된다. 난 OO엄마, OO아내도 괜찮지만, "난 OO"이고 싶다"를 곱씹었다. 평생 내 이름을 잃지 않고, 내 주체를 잃지 않고, 살고 싶어...열심히 버텼다. 아이도 지켜내고 나도 지켜내고 내 경력도 포기할 수 없어서, 열심히 먹고, 쉬고, 일하고 정말 숨이 가빴던 듯하다. 회사에서 여자라서 결혼해서 같이 일하기 불편하다는 편견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 다음으로 나 같은 꿈을 꾸며 달려올 또 다른 나 같은 이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니, 이제는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꿈같은 일이었다.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다니, 지금이야 헤드헌터가 일반화되었지만, 내가 주니어 시절엔 한 회사에 입사를 하면 거의 평생직장으로 다니다가 정년 퇴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고, 내가 대기업인 첫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선 걱정의 시선이 더 컸었다.

 

그래서 이번엔 미국계 회사로 이직을 했다. 3번째 만나는 회사다. 아이는 돌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침마다 출근은 전쟁이었다. 안 떨어지려는 우는 아이를 뒤로 한채 "엄마는 회사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만 하고, 나는 독한 워킹맘의 출근길을 재촉해야 했다. 미국계회사라 본사와의 컨퍼런스콜은 주로 저녁 10시쯤 하게 되었다. 이런 날은 무조건 야근이 예정되어 있었고, 귀가하면 밤 12시...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는 상태이고, 난 씻지도 못한 채, 잠든 아이 옆에서 슬며시 누어 작은 손을 잡고 잠에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힘들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미쿡(?)사람들의 너무 빠른 대화 내용은 언어적 장벽을 크게 느끼게 했고, 과중한 업무로 영어학원에 다닐 수 없었던 난, 새벽반에 영어수업을 듣기로 하고,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회사 근처 영어학원에 등록해 오전 7시~8시 수업을 듣고, 8시 30분까지 출근을 했었다. 매일 12시가 넘어 귀가하고 5시 30분에 기상하니, 수험생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아시아 본사가 싱가포르에 있어, 이메일을 영어로 보내는 것외에 해외에서 전화가 수시로 오기 때문에 영어회화는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었던 것 같다. 쓸데없는 완벽병(?)으로, 본사에서 평가하는 업무능력의 최고 점수를 받아야 직성이 풀렸고, 이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회사에서 여성이 아닌 애엄마가 아닌 "나"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아이에 대한 돌봄이나 시간을 상대적으로 덜 보내고, 주말엔 거의 실신하게 되어, 아이에게 너무도 미안한 맘이 들게 되었다. 이렇게 하다간 아이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평생을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름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와 도서관도 가고, 어딘가에 놀러도 갈 수 있도록 노력도 했지만, 줄곧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엄마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걱정과 미안함을 아이가 알았을까... 나의 빈자리가 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너무도 씩씩하게 잘 자라 주었고, 혼자서 한글도 떼고, 스스로 강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훌쩍 커버린 아이를 보며, 난 무엇을 놓치고 있나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내 경력도 중요하지만, 바른 정서를 만들어줄 엄마의 몫도 있기에 나는 다시 한번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면 야근이 적은 곳이며, 더욱 조직이 크고, 전문성이 확보된 곳으로 이직을 해야 했다. 경력은 충분히 쌓았으니, 워킹 레벨이 아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리로의 이직이 필요한 시기였다. 늘 꿈꾸던 일이긴 한데, 그 무겁고 어려운 일을 내가 잘해 낼 수 있을지 의심하며, 가능한 일자리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워킹맘으로 살아남기 2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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